세계의 수많은 경제 위기들은 종종 제대로 된 원인 분석 없이 간과되곤 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경제 침체는 어쩌면 그냥 잊혀지는 현상일 수도 있다. 이와 다르게 너무나도 큰 사태들은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다. 근래에 있던 세계의 경제 위기들을 돌이켜 보면, 닉슨 쇼크, 석유 파동, 일본 무동산 버블, 닷컴 버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위기, 유럽 피그스 사태(그리스 재정 위기), 그리고 코로나19 정도인데 이들은 원인이 철저히 분석되었다. 이러한 위기 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부동산 버블 후유증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며 많은 재정 정책들의 기반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 사건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당시 일본의 상황을 일본의 시각에서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1970년대에 전 세계의 주요 경제 대국 중 하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은 그야말로 놀라운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오일 쇼크는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일본 자동차 업체들에게는 기술적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한 기회였다. 일본의 자동차는 고장이 적고 가격이 저렴했으며, 연비 또한 우수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의 전자 제품이 국제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의 백색 가전제품과 반도체는 세계 시장을 완벽하게 주도했다. 또한 세계 대중 시장에 진출한 소니의 워크맨은 일본의 전자 기술의 상징이었다. 더불어 일본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상품인 일본 애니메이션과 장인들이 만든 공예품 등으로 세계를 매료시켰다.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선진국들은 혼자서 잘나가는 일본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미국 정부 또한 국민의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 선진국들을 동원하여 강력한 대응을 일본에 펼쳤다. 이 대응의 주요 내용은 엔화 가치 조정과 반도체 시장에서의 일본의 점유율 조정이었다. 당시 이 합의에 대해 어떻게 일본이 영향을 받을지 예측하기는 어려웠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결정들이 어떻게 일본에 영향을 미칠지는 불분명했다. 당시,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저팬'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이 책은 단순히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 기업의 우월성을 강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단순한 경제적인 측면뿐만이 아닌 일본의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부터 일본이 처음으로 맞은 철퇴는 환율 조정이었다. 당시 1달러 대비 일본 엔화는 약 230엔 정도였다. 당시 엔화는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급격히 높이자 상대적으로 환율이 많이 올라간 상태였다. 환율로 인해 물건값이 상대적으로 싸진 일본 제품을 견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정부들이 대량으로 엔화를 매입하는 것이 당시의 합의 내용이다. 세계 각지에서 엔화 수요가 급증하자 엔화 환율은 단기간에 150엔 정도로 하락했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의 골고루 퍼진 일본 엔화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통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은 자기 나라의 화폐를 세계의 안전자산으로 만드는 이익을 얻는 대가로 자국 제품들의 가격 경쟁력을 잃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 내 해외 제품들의 가격은 거의 반값으로 떨어뜨렸다.
문제는 이 철퇴에 일본이 단기적으로 예상했던 효과와 다르게 반응하여, 오히려 일본에 큰 자신감을 주었고 그들이 원래 해야 했던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환율 변화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데 실패했다. 환율 조정 이후, 가격이 두 배로 증가한 일본 제품의 수출량은 생각보다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품은 고급화되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본 제품을 구매했다. 일본 내에서는 해외 제품들이 상대적으로 저급한 것으로 여겨져 외면받았다. 몇몇 명품들만이 가격이 반값으로 내려가면서 수입이 늘어났다. 당시 구찌, 루이비통등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는 도쿄 셀렉션을 따로 만들만큼 일본에 충성했다. 갑작스러운 엔화 가치의 상승으로 무역환경이 바뀌자 일본 정부는 내수 시장 촉진을 위해 엔화를 적극적으로 풀게 된다. 하지만 내수 시장은 그다지 커지지 못했고, 갈 곳을 잃은 자금들은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또 철퇴 일본의 시장 점유율을 비정상적으로 제한하는 반도체 협정이었다. 이 협정은 단순히 일본의 반도체 가격을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시장 개입으로 인해서 판매량을 제한시켰다 . 당시에는 일본의 반도체 제조 기술은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비록 미국 기업이 유사한 반도체를 생산해 판매하더라도 일본 기업의 순이익을 따라잡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은 기술력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공급 체인을 다변화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더 싼 인건비와 더불어 비슷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대만을 함께 성장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미국이 기술력과 시장을 제공하고 한국과 대만의 공격적인 전략에 일본은 더 이상 시장에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실을 겪게 되었다.
일본이 버블이 생긴 것은 크게 보면 이 두가지 철퇴, 환율과 반도체 협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각의 이유는 있지만, 그들의 과도한 자신감이 그들을 망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살펴보면 이유는 쉽다. 세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인해 일본인들의 재산은 어느날 갑자기 두배가 되었다. 전 세계에 어디를 가나 일본인만큼 부자들은 찾기 힘들었다. 일본인들은 언제나 최고만을 선택해서 소비했다. 또한 일본이 자랑했던 제조업의 기술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무리 한국과 대만이 그들을 추격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을 앞서간 자신들의 기술력을 따라올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에서 버블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만 기술하도록 하겠다. 그냥 그들이 자만심을 가질만한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까지만 쓰겠다. 좋은 시절까지만 쓰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상황을 오판하게 만들어 그릇된 자만심이 키우는 과정을 쓰고 싶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버블 사회에 대해 조금만 더 말하겠다. 버블 사회는 끔찍하다. 부동산 시장의 버블은 일본의 민심을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치솟는 부동산은 일본을 평생을 일해도 집 한 채를 살 수 없는 나라, 노력해도 닭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나마 대기업에 취직하면 조금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변변찮은 기술이 없거나 높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야쿠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출세 방법이었다. 점점 젊은이들의 희망은 없어졌다. 일본은 야쿠자들이 번성하는 나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공무원들은 부패없이 자산을 불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리크루트 사건으로 정경유착으로 일본은 공공연하게 부패가 판치는 곳이 되었다.
이 버블을 수습하고 나라를 다시 추수리고 민심을 잡는데 일본은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버블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이 앞으로 어떤 나라를 만들지 상당히 흥미롭다. 그동안 일본은 경제 체제 전환을 이루었고, 많은 부분에서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다만 버블 시절의 팍팍한 삶은 그들을 고령화 사회로 이끌었고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의 다양화로 세계는 유례없이 커져 버렸다. 중국은 GDP에서 일본을 앞서고 있고, 한국은 1인당 명목 GDP에서 1년안에 일본을 앞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은 저력이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1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그저 가만히 자신들이 세계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굉장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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